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영화를 보면서 손에 땀을 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반신반의하며 《서울의 봄》을 틀었고, 141분이 끝날 무렵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밤, 서울에서 벌어진 9시간의 군사반란을 다룬 이 영화는 역사 기록물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긴장극이었습니다. 그날 밤 서울은 왜 그렇게 위태로웠을까 — 시대적 배경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12·12 군사반란이라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교과서에서 한두 줄로 지나쳤던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그 맥락이 얼마나 복잡하고 긴박했는지를 실감했습니다.출발점은 1979년 10월 26일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18년 가까이 이어진 유신 체제, 즉 헌법..
역사 영화는 보기 전에 늘 반쯤 의무감이 앞섭니다. '좋은 영화인 건 알겠는데, 오늘은 좀 가볍게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저도 그랬습니다. 2015년 개봉작 《암살》을 틀기 전까지는요. 일반적으로 역사 영화는 묵직하고 느리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암살》은 달랐습니다. 139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마지막 장면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1933년 상하이와 경성 — 이 영화가 선택한 시대《암살》의 배경은 1933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상하이와 경성입니다. 일제강점기란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약 35년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시기를 말합니다. 단순히 나라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니라, 언어와 이름과 토지까..
역사 영화를 볼 때마다 저는 미리 겁을 먹는 편입니다. '또 무겁고 비장하게 끝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거든요. 그래서 《박열》을 선택할 때도 사실 조금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이 영화는 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법정이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가장 강한 무기를 쥘 수 있다는 걸 이 영화에서 처음 실감했습니다. 법정 장면이 이렇게 긴장될 줄 몰랐습니다 — 박열의 재판과 아나키즘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 후반부의 재판 장면에서 저는 자꾸 자세를 고쳐 앉게 됐습니다. 법정이라는 공간이 그렇게 팽팽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거든요.박열은 아나키즘(Anarchism) 사상을 가진 인물로 등장합니다. 여..
2%라는 숫자가 '가능성'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됐을까요. 저는 솔직히 없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2017년 개봉한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에서 낮은 지지율로 출발한 노무현이 어떻게 대선 후보 자리에 올랐는지를 39명의 증언과 당시 자료 화면으로 되짚는 작품입니다. 국민참여경선과 노풍 — 2%에서 시작된 이야기제가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국민참여경선'이라는 단어를 그냥 흘려들었습니다. 국민참여경선이란 당원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선거인단으로 참여해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쉽게 말해 당내 경선을 시민에게 직접 열어놓은 구조입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도입한 이..
솔직히 저는 바둑을 거의 모릅니다. 집에 바둑판이 있어도 돌을 어떻게 놓는지 기본 규칙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승부》를 보고 나서 두 시간 내내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스승과 제자가 세월이 흐른 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건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바둑을 몰라도 보이는 것들 — 영화 《승부》의 팩트영화 《승부》는 2025년 3월 26일 개봉한 115분짜리 스포츠 드라마입니다. 김형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각본은 김형주·윤종빈이 함께 썼습니다. 이병헌이 조훈현 9단을, 유아인이 이창호 9단을 연기했습니다.제가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은 건 순전히 설정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이 직접 키운 제자에게 패배한다는 이야기..
솔직히 말하면, 영화관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파묘》를 단순한 귀신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넘게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극장을 나온 뒤에도 한참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풍수사, 무속인, 장의사, 법사가 한 무덤을 파내면서 마주한 것이 단순한 원혼이 아니라 오랫동안 묻혀 있던 역사의 상처였다는 점, 그게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줄거리 — 무덤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꺼내는 이야기영화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 부유한 가족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현상이 반복되면서 시작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부터 가족 구성원 전체에 걸쳐 이상 징후가 이어지는데, 단순한 질환이나 우연으로 보기에는 패턴이 너무 뚜렷합니다.결국 가족은 풍수사 상덕, 장의사 영근, 무속인 화림, 법..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울린 총성 세 발이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영화 《하얼빈》을 보고 나서 솔직히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역사책에서 딱 두 줄로 읽었던 사건이, 스크린 위에서는 전혀 다른 무게로 내려앉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 역사적 배경부터 짚고 갔습니다영화관에 가기 전에 제가 먼저 찾아본 것이 있습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정확히 어떤 조약이었는지였습니다. 여기서 을사늑약이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해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나라의 얼굴, 즉 외교 기능 자체를 일본이 빼앗아간 사건입니다. 이 조약이 있었기에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할 수 있었고, 안중근이 ..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서로를 적으로 여기던 남북한 외교관들이 목숨을 걸고 함께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처음엔 단순한 탈출 액션 영화라고 생각하고 틀었는데, 끝나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줄거리 — 외교 경쟁에서 공동 생존으로영화는 1990년대 초반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유엔(UN) 가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유엔 가입이란 단순한 외교적 형식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한국 대사관은 소말리아 정부의 지지표를 얻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이고, 북한 역시 같은 목적으로 소말리아에서 외교 활동을 펼칩니다. 한신성 대사와 북한의 림용수 대사는 서로를 노골적..
솔직히 말하면, 영화관 자리에 앉았을 때까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역사 전쟁 영화라는 게 자칫 교과서 삽화처럼 뻔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한산: 용의 출현》은 달랐습니다. 포성이 처음 울리던 순간부터 시작해서 학익진이 완성되는 장면까지, 제가 두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아챘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순신이 어떻게 한산도 대첩을 설계했는지, 지금부터 제가 본 그대로 풀어보겠습니다. 학익진 전술 — 바다를 함정으로 만든 설계도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이순신이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조선 육군이 연이어 무너지고 한양까지 함락된 상황에서, 바다마저 빼앗기면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 이순신이 가..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수십만 대군이 고구려의 작은 산성 하나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영화 《안시성》을 보고 나서 저는 이 짧은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묵직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645년 고당전쟁, 역사적 배경부터 짚어야 영화가 제대로 보입니다영화를 보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이 들었습니다. 당나라가 그렇게 강대한 제국이었다면, 왜 작은 산성 하나를 못 넘었을까요?영화의 배경은 제1차 고당전쟁(645년)입니다. 여기서 고당전쟁이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군사 충돌을 의미합니다. 당 태종은 중국 내부를 통일한 뒤 동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요동 지역의 여러 성을 차례로 밀어붙이며 진격했습니다. 그 경로 위에 안시성이 있었습니다.안시성은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