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사극은 으레 정치 싸움만 보여주는 장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왕과 닮은 광대 하선이 왕의 자리에 앉으면서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결국 '좋은 지도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아주 조용하게 던집니다. 이병헌 배우의 1인 2역 연기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다 보고 나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연기가 아니라 하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이병헌 1인 2역, 기대와 실제 사이일반적으로 1인 2역(one actor, two roles) 연기라고 하면 단순히 분장을 바꾸거나 목소리 톤을 살짝 달리하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1인 2역이란 한 배우가 같은 작품 안에서 전혀 다른 두 인..
솔직히 말하면, 저는 《동네사람들》을 완전히 잘못 예상하고 봤습니다. 마동석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통쾌한 액션이 주를 이루는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주먹 한 방의 쾌감이 아니라, 사람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진지하게 찾지 않는 그 이상한 고요함이었습니다. 2018년 개봉한 임진순 감독의 작품으로, 실종된 여고생을 둘러싼 마을의 집단적 침묵을 파고드는 이야기입니다. 무관심이 만들어내는 공포일반적으로 범죄 스릴러라고 하면 빠른 전개와 강렬한 악당이 공포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을 보고 나니 그 공식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영화에서 가장 섬뜩했던 장면은 격렬한 몸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여고생 한수연이 사라졌는데 마을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남미를 배경으로 한 통쾌한 성공담 정도를 기대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콜롬비아로 건너간 청년이 낯선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범죄 드라마입니다. 기회를 잡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저의 시각이, 107분이 지난 뒤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만든 이민의 풍경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시대적 배경이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배경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외환위기란 국가가 외채를 갚을 외화가 부족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사건으로, 당시 수많은 가정이 하루아침에 삶의..
솔직히 저는 《글로리데이》를 보기 전까지 제목만 보고 완전히 잘못 짐작했습니다. '영광의 날'이라는 이름 때문에 웃음 넘치는 청춘 로드무비를 기대했는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표면적인 판단을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이 글은 그 당혹감에서 출발한 영화 이야기입니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 생각보다 훨씬 불안한 시기였습니다저도 친구들과 훌쩍 떠났던 여행이 몇 번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면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영화 속 네 친구도 딱 그런 시간 속에 있었습니다. 군 입대를 앞둔 친구의 마지막 여행, 아무 계획 없이 웃고 떠들며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풍경이기도 합니다.그런데 영화는 그 평온한 분위기를 ..
몸이 바뀌는 영화는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안의 그놈》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고등학생 동현과 중년 사업가 판수가 우연한 사고로 몸이 뒤바뀌는 이 영화, 코미디로 시작해서 보고 난 뒤에는 사람을 판단하는 제 시선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몸바꾸기 설정, 정말 그냥 웃자고 만든 걸까일반적으로 바디 스왑(body swap) 장르, 즉 두 사람의 몸과 영혼이 뒤바뀌는 설정은 단순히 웃음을 위한 장치로 여겨집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영화를 봤더니, 이 설정이 단순한 개그 도구를 넘어 훨씬 더 치밀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동현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심한 학생입니다. 판수는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자신의 과거와 가족 관계에서는..
방황하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한 적 있으십니까? 저는 《시동》을 보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2019년 개봉한 이 영화는 목적지도 없이 집을 나온 스무 살 택일의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한동안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아직 시동조차 제대로 못 건 사람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청춘의 방황, 실제로는 얼마나 흔한 일인가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택일이 특별히 문제 있는 청년은 아니구나"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비슷한 시기를 보낸 경우가 꽤 있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통계를 보면 이 감각은 근거가 있습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니트(NEET)족 — 여기서 니트족이란 교육도 받지 않고, 취업도 하지 않고, 직업 훈련도 받지..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는 2018년 2월 개봉한 사극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흥부전》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뒤집은 작품입니다. 흥부전을 쓴 사람이 실은 흥부 자신이었다는 설정 — 이 한 줄이 저를 영화관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단순한 고전 각색인 줄 알았다가, 보고 나서 꽤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 홍경래의 난이 만들어낸 한 사람의 이야기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헌종 14년입니다. 그리고 흥부의 어린 시절에는 실제 역사 사건인 홍경래의 난이 등장합니다. 홍경래의 난이란 1811년 평안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로, 지역 차별과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불평등이 폭발한 사건입니다(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역사정보). 쉽게 말해, 가진 자들의 권력 다툼이 결국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
선거 뉴스를 볼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 후보보다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더 궁금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떤 전략을 짰을까, 저 연설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죠. 영화 《킹메이커》를 보게 된 것도 그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2022년 개봉한 이 작품은 변성현 감독이 연출하고 설경구·이선균이 주연을 맡았는데, 정치인보다 그를 만든 사람의 이야기에 더 집중한다는 점에서 보기 전부터 달랐습니다. 1960~70년대, 선거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영화의 배경은 1960~70년대 한국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선거는 비교적 익숙한 정치 과정이지만, 영화 속 시대는 달랐습니다.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고, 정치적 발언 하나가 생사를 가르기도 했습니다.《킹메이커》는 고..
좋은 땅을 얻으면 정말 운명이 바뀔까요? 저는 이 질문을 품고 영화 《명당》을 봤습니다. 풍수지리를 소재로 한 사극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서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땅을 향한 욕망과 권력을 향한 욕망이 어쩜 이렇게 닮아 있는지, 보는 내내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 그 배경을 알고 보니 달랐습니다사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배경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장동 김씨'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도 그냥 극 중 가상의 집단인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 이게 실제 역사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모티브로 한 설정이었습니다.여기서 세도정치란 왕의 외척 가문이 정치 전반을 장악하고 왕권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권력 구조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임금이 있어도 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거친 남자 고등학생들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영화 《바람》(2009)을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배우 정우의 실제 학창 시절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말이 괜한 홍보 문구가 아니었습니다. 108분 내내 누군가의 진짜 기억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또래 집단과 인정 욕구, 이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딱 이런 친구가 반에 한 명씩은 있었습니다. 특별히 나쁜 애도 아닌데, 어디선가 선배한테 찍혀서 괜히 센 척하다가 일을 키우는 그런 유형이요. 《바람》의 주인공 짱구가 딱 그렇습니다.짱구가 입학한 광춘상고는 선도부의 위세와 불법 서클 '몬스터'의 영향력이 뒤섞인 학교입니다. 영화 심리학에서는 이런 환경을 또래 동조 압력(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