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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바둑을 거의 모릅니다. 집에 바둑판이 있어도 돌을 어떻게 놓는지 기본 규칙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승부》를 보고 나서 두 시간 내내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스승과 제자가 세월이 흐른 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건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바둑을 몰라도 보이는 것들 — 영화 《승부》의 팩트
영화 《승부》는 2025년 3월 26일 개봉한 115분짜리 스포츠 드라마입니다. 김형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각본은 김형주·윤종빈이 함께 썼습니다. 이병헌이 조훈현 9단을, 유아인이 이창호 9단을 연기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은 건 순전히 설정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이 직접 키운 제자에게 패배한다는 이야기. 자식에게 맞아본 부모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배경은 한국 바둑계의 실제 역사입니다. 조훈현은 공격적이고 직관적인 수읽기, 이른바 속기(速棋) 스타일로 세계 정상을 차지한 기사입니다. 여기서 속기란 빠른 직관으로 형세를 읽고 상대를 몰아붙이는 바둑 스타일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체스에서 공격형 오프닝을 즐기는 선수처럼 주도권을 쥐고 상대를 압박하는 방식입니다.
반면 이창호의 바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치밀한 계가(計家)와 끝내기를 특징으로 합니다. 계가란 바둑판 위에 놓인 돌의 집, 즉 확보한 영역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입니다. 흔히 '돌부처'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집을 지켜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조훈현이 기세로 이기는 바둑을 뒀다면, 이창호는 한 집 한 집 쌓아 올려 이기는 바둑을 뒀던 셈입니다.
영화는 이 두 스타일의 충돌을 꽤 잘 시각화했습니다. 바둑을 모르는 저도 빠른 착점(着點)과 긴 고민 끝에 놓이는 한 수의 온도가 다르다는 걸 화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착점이란 바둑돌을 판 위에 내려놓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우들의 손동작 하나에도 캐릭터의 성격이 담겨 있었습니다.
- 개봉일: 2025년 3월 26일 / 상영시간: 115분 / 관람등급: 12세 이상
- 이병헌(조훈현 9단) — 공격적 속기 스타일, 승부사 기질의 전설적 기사
- 유아인(이창호 9단) — 치밀한 계가와 끝내기로 '돌부처'라 불린 천재 기사
- 조훈현이 직접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여 자신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가르침
- 사제 첫 공식 대결에서 이창호가 예상을 깨고 조훈현을 꺾으며 세대교체 신호탄
이병헌이 실제 조훈현의 말투와 자세, 머리 모양까지 세밀하게 재현했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면서 바로 체감했습니다. 특히 패배 직후 바둑판을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자존심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연기인 줄 알면서도 제가 잠깐 숨을 참았을 정도였습니다. (출처: 연합뉴스)
직접 겪어보니 알게 된 것 — 스승이 제자에게 패배할 때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멈춰 생각했던 순간은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처음으로 패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단순히 졌다는 사실보다, 그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훈현의 표정에서 더 많은 것이 보였습니다.
저도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번 했습니다. 오래 가르쳐준 후배가 제가 몇 년씩 걸려 터득한 것을 몇 달 만에 가볍게 넘어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느낀 건 자랑스러움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내가 이미 별 볼 일 없어진 건가' 하는 씁쓸함이 먼저 왔습니다. 그래서 조훈현의 복잡한 표정이 저한테는 과장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인상적인 이유는 서로의 바둑 스타일이 극과 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차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조훈현 자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가르쳤기에 제자가 어떤 수를 둘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조훈현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이제는 상대를 이기는 데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역설을 생각하니 가슴이 좀 먹먹했습니다.
이창호 역시 단순히 이긴 사람으로만 그려지지 않는 점이 좋았습니다. 승리한 뒤에도 바둑판에서 눈을 금방 들지 못하는 장면에서, 이기는 것이 그에게도 마냥 시원한 일이 아니었음을 느꼈습니다. 스승이라는 존재를 향한 감정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 제 경험상 이건 꽤 사실적인 묘사입니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형세 판단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형세 판단이란 현재 바둑판 전체의 흐름과 유불리를 읽어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눈앞의 돌을 보는 게 아니라 전체 판을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 이건 바둑을 넘어 삶의 태도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어떤 결정을 앞두고 눈앞의 상황만 보다가 크게 실수한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이 겹쳐 보였습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미화(문정희) 역할이 조훈현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역할로 설정됐는데, 그 역할이 충분히 깊어지지 못한 채 마무리된 느낌이 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시선에서 조훈현의 패배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조금 더 보여줬다면 영화가 더 풍성해졌을 것 같습니다. (출처: 연합뉴스)
그럼에도 《승부》가 제게 오래 남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진짜 승자는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패배한 순간에도 다시 바둑판 앞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이건 영화가 직접 말해주는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화면을 보다 보니 제가 그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둑을 전혀 모르면 영화 《승부》를 이해하기 어렵나요?
A. 저도 바둑 규칙을 거의 모른 채 봤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영화는 착점 하나하나를 설명하기보다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속기와 계가의 차이를 화면 흐름으로 느낄 수 있게 연출했기 때문에, 바둑판을 몰라도 두 사람의 온도 차이는 충분히 전달됩니다.
Q. 이병헌과 유아인 중 누구의 연기가 더 인상적이었나요?
A. 제 경험상 이 질문이 제일 어렵습니다. 이병헌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압도적이었고, 유아인은 이기고 나서도 기뻐하지 못하는 복잡한 내면을 절제된 표정으로 담아냈습니다. 두 사람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장면에서는 어느 한 사람을 집중해서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Q. 영화 《승부》는 실화를 얼마나 충실하게 따라가나요?
A.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사제 관계, 그리고 제자가 스승을 꺾으며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큰 흐름은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합니다. 다만 영화적 재구성이 들어간 부분도 분명 있으며, 인물의 내면 감정은 감독의 해석이 더해진 부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Q. 영화 《승부》, 가족과 함께 봐도 괜찮은가요?
A. 관람등급이 12세 이상으로, 자극적인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고 나서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상영관에도 중장년층 관객이 꽤 많았습니다.
결론
《승부》를 보고 나서 한동안 조훈현의 눈빛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이 영화는 바둑을 소재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형세 판단이라는 행위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한 수를 놓을 것인지 묻는 영화입니다. 승패보다 더 무거운 것은 패배한 뒤 다시 앉는 자세라는 걸, 115분 동안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둑에 관심이 없어도, 스포츠 영화를 평소에 잘 안 봐도 괜찮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이 있거나, 존경하던 사람보다 더 멀리 가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이 영화는 그 기억을 꺼내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들 것입니다. 제 경험상 그런 영화는 오래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