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개봉한 《우아한 세계》는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가 주인공인 느와르 영화임에도 흥행 성적보다 "40대 가장의 애환을 담은 작품"으로 더 오래 회자됩니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비웃었습니다. 조폭 영화에 '우아'라는 단어가 붙다니, 제목만으로도 역설이 완성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000년대 한국의 사회적 배경과 이 영화가 태어난 맥락《우아한 세계》가 만들어진 2000년대 중반은 이른바 '가장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이데올로기란, 남성 가장이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책임지는 것이 곧 사랑의 증명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말합니다. 좋은 집, 안정적인 수입, 자녀 교육—이 세 가지를 갖추면 좋은 아버지라는 등식이 암묵적으로 통용됐습니다.강인구라는 캐릭터는 ..
《춘향전》은 알아도 방자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2010년 개봉한 영화 《방자전》을 보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한쪽 시선으로만 이 고전을 읽어왔는지 실감했습니다.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신분과 욕망, 그리고 사람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줄거리: 방자 시점으로 본 춘향전영화 《방자전》은 2010년 6월 2일 개봉한 사극·멜로 장르 작품입니다. 감독 김대우, 출연 김주혁(방자), 류승범(이몽룡), 조여정(춘향), 류현경, 송새벽. 상영 시간은 124분이고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입니다.원작인 고전 소설 《춘향전》에서 방자는 이몽룡의 심부름꾼, 조력자 정도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그 방자를 이야기의 중심에 세웁니다.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시..
영화 《간신》은 2015년 개봉 당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고 강한 표현으로 호불호가 갈렸던 작품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단순히 연산군의 폭정을 다룬 사극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왕 옆에서 그 욕망을 이용해 권력을 키워가는 임숭재라는 인물이 어쩌면 왕보다 더 무서웠거든요. 줄거리와 임숭재라는 인물영화의 배경은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의 재위 11년입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국에서 여성들을 강제로 궁에 데려오라는 명을 내리고, 이 역할을 맡은 직책이 채홍사(採紅使)입니다. 여기서 채홍사란 왕의 명으로 전국 각지에서 여성들을 선발해 궁으로 불러들이는 임무를 맡은 관직을 뜻합니다. 그 채홍사로 임명된 인물이 바로 주지훈이 연기한 임숭재입니다.저는 처음에 임숭재가 그냥 왕의 명을 따르는 신..
서울 강남을 지나다 보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높은 아파트, 정비된 도로, 즐비한 상업시설. 저는 그게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남 1970》을 보고 나서 그 무심함이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개발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 어떤 사람들의 욕망과 선택이 쌓여 있었는지를, 이 영화가 꽤 날카롭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시대적 배경 — 개발이 시작되던 강남, 그리고 그 땅의 의미《강남 1970》의 배경은 1970년대 서울입니다. 지금의 강남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강남 지역은 도시계획에 의해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서울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행정 당국이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밀어붙이던 때였습..
방황하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한 적 있으십니까? 저는 《시동》을 보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2019년 개봉한 이 영화는 목적지도 없이 집을 나온 스무 살 택일의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한동안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아직 시동조차 제대로 못 건 사람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청춘의 방황, 실제로는 얼마나 흔한 일인가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택일이 특별히 문제 있는 청년은 아니구나"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비슷한 시기를 보낸 경우가 꽤 있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통계를 보면 이 감각은 근거가 있습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니트(NEET)족 — 여기서 니트족이란 교육도 받지 않고, 취업도 하지 않고, 직업 훈련도 받지..
선거 뉴스를 볼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 후보보다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더 궁금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떤 전략을 짰을까, 저 연설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죠. 영화 《킹메이커》를 보게 된 것도 그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2022년 개봉한 이 작품은 변성현 감독이 연출하고 설경구·이선균이 주연을 맡았는데, 정치인보다 그를 만든 사람의 이야기에 더 집중한다는 점에서 보기 전부터 달랐습니다. 1960~70년대, 선거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영화의 배경은 1960~70년대 한국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선거는 비교적 익숙한 정치 과정이지만, 영화 속 시대는 달랐습니다.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고, 정치적 발언 하나가 생사를 가르기도 했습니다.《킹메이커》는 고..
건달이 목사 행세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게 바로 이 영화가 노린 지점입니다. 2024년 3월 개봉한 《목스박》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목 하나가 이렇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고, 보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에 설정이 맴돌았습니다. 설정충돌이 만들어내는 웃음의 구조《목스박》의 핵심 재미는 장르 문법에서 말하는 '설정충돌(character clash)'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설정충돌이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캐릭터나 공간이 한 프레임 안에서 충돌하면서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발생시키는 극작 기법을 의미합니다. 한국 액션 코미디 영화는 이 기법을 자주 써왔지만, 《목스박》은 그 조합의 낙차를 최대치로 밀어붙인 경우라고 제가 직접..
유관순 열사는 1920년,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순국했습니다. 당시 나이 열여덟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영화 《항거》를 보고 나서야 저는 그 숫자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역사책에서는 이름과 날짜로 기억되는 사람이, 화면 안에서는 두려워하고 고통받는 한 명의 사람으로 살아 있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목소리를 잃지 않은 사람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 감독 조민호, 주연 고아성)는 3·1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의 옥중 생활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제가 보기 전에 기대했던 건 만세운동의 현장 재현이었는데, 실제로 영화가 카메라를 들이댄 곳은 오히려 좁고 어두운 감옥 안이었습니다. 그게 처음엔 낯설었는데, 보다 보니 그 선택이 정확했다는 걸 느꼈..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교과서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아, 이 달리기가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었구나"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2023년 9월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정리해봤습니다. 역사적 배경 — 태극마크를 달기까지 얼마나 걸렸는가영화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손기정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유니폼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습니다. 남승룡 선수 역시 동메달을 획득했지만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솔직히 저는 《취화선》을 보기 전까지 장승업을 그냥 '조선 3대 화가 중 한 명'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교과서에서 이름을 봤을 뿐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방황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그 무지가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지 실감했습니다. 2002년 제5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단순한 위인전이 아니라 한 시대의 균열 속에서 자신의 붓을 지키려 했던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조선 후기라는 시대, 장승업이 버텨야 했던 구조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주목한 건 장승업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그가 태어난 시대였습니다. 19세기 조선은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세도정치란 왕권이 약해진 틈을 타 특정 외척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