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개봉한 《우아한 세계》는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가 주인공인 느와르 영화임에도 흥행 성적보다 "40대 가장의 애환을 담은 작품"으로 더 오래 회자됩니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비웃었습니다. 조폭 영화에 '우아'라는 단어가 붙다니, 제목만으로도 역설이 완성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000년대 한국의 사회적 배경과 이 영화가 태어난 맥락《우아한 세계》가 만들어진 2000년대 중반은 이른바 '가장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이데올로기란, 남성 가장이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책임지는 것이 곧 사랑의 증명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말합니다. 좋은 집, 안정적인 수입, 자녀 교육—이 세 가지를 갖추면 좋은 아버지라는 등식이 암묵적으로 통용됐습니다.강인구라는 캐릭터는 ..
왕이 직접 사건 현장을 누빈다는 설정, 처음엔 그냥 웃기려고 만든 장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사건수첩》을 다 보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나는 평소에 얼마나 제대로 확인하고 판단하는 걸까"였습니다. 웃으면서 보다가 끝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 영화, 저는 그런 작품을 오래 기억합니다. 조선시대 왕의 정보 환경,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까《임금님의 사건수첩》을 보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조선시대 임금은 대체 어떤 경로로 나라 안의 일을 파악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실시간 검색 하나로 전국 소식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는 달랐으니까요.조선은 사관(史官) 제도를 두어 왕의 언행과 주요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관이란 역사적 사실을 공식 문서로 남기는 전담 ..
서울 강남을 지나다 보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높은 아파트, 정비된 도로, 즐비한 상업시설. 저는 그게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남 1970》을 보고 나서 그 무심함이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개발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 어떤 사람들의 욕망과 선택이 쌓여 있었는지를, 이 영화가 꽤 날카롭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시대적 배경 — 개발이 시작되던 강남, 그리고 그 땅의 의미《강남 1970》의 배경은 1970년대 서울입니다. 지금의 강남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강남 지역은 도시계획에 의해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서울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행정 당국이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밀어붙이던 때였습..
솔직히 저는 《반창꼬》를 보기 전까지 제목을 오타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창고'가 맞는 표현인데 왜 '꼬'로 끝나는 걸까 싶었거든요. 그냥 가볍게 웃고 끝나는 로맨스 영화일 거라 예상했는데, 다 보고 나서는 그 오타처럼 보이던 제목이 영화 전체를 꿰뚫는 가장 정확한 단어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소방관과 의사,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줄거리: 구조 현장보다 마음이 더 위험했다2012년 12월에 개봉한 《반창꼬》는 고수, 한효주 주연의 멜로 드라마입니다. 러닝타임 120분, 15세 관람가. 감독은 정기훈입니다.줄거리의 출발점은 꽤 현실적입니다. 외과의사 미수는 의료사고(medical malpractice)와 얽힌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방관 강일의 증언이 필요해집니다..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2010년 개봉한 장진 감독의 《퀴즈왕》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133억 원이라는 숫자보다 영화가 끝나고 훨씬 오래 머릿속에 남은 건 전혀 다른 질문이었습니다. 강변북로 교통사고에서 시작된 이야기요즘 들어 저는 긴장감이 팽팽한 영화보다 편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을 더 찾게 됩니다. 그러다 장진 감독의 《퀴즈왕》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처음 선택한 이유는 솔직히 단순했습니다. 133억 원짜리 퀴즈쇼라는 설정이 가볍게 보기에 딱 좋아 보였거든요.영화는 강변북로에서 벌어진 4중 추돌사고로 시작합니다.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던 사람들이 하나의 사고로 묶여 경찰서로 향하고, 그곳에서 우연히 방송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한 퀴즈쇼..
범인이 이미 잡혔는데, 그게 진짜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화 《끝장수사》는 바로 그 질문 하나로 97분을 꽉 채웁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선택했을 때는 그냥 가볍게 볼 수 있는 형사물이겠거니 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종결된 살인사건에 왜 다시 손을 댔나 — 영화의 설정과 구조《끝장수사》는 박철환 감독이 연출하고 배성우, 정가람, 이솜, 윤경호가 출연한 범죄·액션 코미디 영화입니다. 2019년에 촬영을 마쳤지만 여러 사정으로 개봉이 약 7년 미뤄져 2026년 4월 2일에야 관객과 만났습니다. 상영시간 97분,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로, 처음에는 《출장수사》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가 개봉 전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됐습니다.영화의 뼈대는 '버디 무비(bu..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사극은 으레 정치 싸움만 보여주는 장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왕과 닮은 광대 하선이 왕의 자리에 앉으면서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결국 '좋은 지도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아주 조용하게 던집니다. 이병헌 배우의 1인 2역 연기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다 보고 나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연기가 아니라 하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이병헌 1인 2역, 기대와 실제 사이일반적으로 1인 2역(one actor, two roles) 연기라고 하면 단순히 분장을 바꾸거나 목소리 톤을 살짝 달리하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1인 2역이란 한 배우가 같은 작품 안에서 전혀 다른 두 인..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남미를 배경으로 한 통쾌한 성공담 정도를 기대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콜롬비아로 건너간 청년이 낯선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범죄 드라마입니다. 기회를 잡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저의 시각이, 107분이 지난 뒤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만든 이민의 풍경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시대적 배경이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배경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외환위기란 국가가 외채를 갚을 외화가 부족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사건으로, 당시 수많은 가정이 하루아침에 삶의..
몸이 바뀌는 영화는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안의 그놈》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고등학생 동현과 중년 사업가 판수가 우연한 사고로 몸이 뒤바뀌는 이 영화, 코미디로 시작해서 보고 난 뒤에는 사람을 판단하는 제 시선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몸바꾸기 설정, 정말 그냥 웃자고 만든 걸까일반적으로 바디 스왑(body swap) 장르, 즉 두 사람의 몸과 영혼이 뒤바뀌는 설정은 단순히 웃음을 위한 장치로 여겨집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영화를 봤더니, 이 설정이 단순한 개그 도구를 넘어 훨씬 더 치밀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동현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심한 학생입니다. 판수는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자신의 과거와 가족 관계에서는..
선거 뉴스를 볼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 후보보다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더 궁금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떤 전략을 짰을까, 저 연설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죠. 영화 《킹메이커》를 보게 된 것도 그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2022년 개봉한 이 작품은 변성현 감독이 연출하고 설경구·이선균이 주연을 맡았는데, 정치인보다 그를 만든 사람의 이야기에 더 집중한다는 점에서 보기 전부터 달랐습니다. 1960~70년대, 선거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영화의 배경은 1960~70년대 한국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선거는 비교적 익숙한 정치 과정이지만, 영화 속 시대는 달랐습니다.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고, 정치적 발언 하나가 생사를 가르기도 했습니다.《킹메이커》는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