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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지인이 간경변증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항상 웃음이 넘치던 분이었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니 몇 달 사이 배가 눈에 띄게 불러왔고, 저는 그걸 그냥 술배라고 넘겼습니다. 간이 보내는 신호를 제가 너무 쉽게 지나쳤던 겁니다.

응급실에서야 알았다는 말이 왜 나오는가
간경변증(liver cirrhosis)은 간 조직이 반복적인 손상과 염증을 거치면서 서서히 딱딱하게 굳어가는 질환입니다. 쉽게 말해, 피부에 상처가 반복되면 흉터가 남듯 간세포가 손상될 때마다 섬유 조직이 쌓여 간이 굳어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조용히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간이 '침묵의 장기'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간은 무게만 1.5kg에 달하는 우리 몸에서 가장 큰 단일 장기로, 수백 가지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기능의 상당 부분을 잃기 전까지는 별다른 이상 신호를 내보내지 않습니다. 간이 사실상 '파업 선언'을 하고 나서야 황달, 복수, 부종 같은 증상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 지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배가 불러오는 것을 주변에서 알아챘지만, 본인도 저도 그게 복수(腹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복수란 간 기능이 저하되면서 복강 안으로 수분이 빠져나와 고이는 증상으로, 만삭의 임산부보다 배가 더 불러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숨쉬기가 버거워지고 소변·대변도 잘 나오지 않게 됩니다. 간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불응성 복수(refractory ascites)라는 단계까지 진행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여기서 불응성 복수란 이뇨제 등 약물로도 복수를 더 이상 조절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1~2주 간격으로 복수를 직접 뽑아내는 시술이 유일한 방법이 되고, 근본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간 이식 외에 선택지가 없습니다.
술도 안 마시는데 복수가 찼다는 말의 의미
간경변증은 흔히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에게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체 지방간 중 알코올성 지방간이 차지하는 비율은 17%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83%는 비알코올성, 즉 대사 이상 지방간입니다(출처: 대한비만대사외과학회).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사람도 얼마든지 간경변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만과 당뇨가 간에 치명적인 이유는 인슐린 저항성(insulin resistance) 때문입니다. 인슐린 저항성이란 인슐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혈당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에너지로 쓰이지 못한 포도당은 지방으로 변환되어 간에 쌓이고, 이것이 지방간이 됩니다. 지방간이 지속되면 간세포에 염증이 생기면서 지방간염으로 발전하고, 그 염증이 간경변증과 간암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15년째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약을 먹어온 이기우 씨의 경우가 바로 이 경로입니다. 술도 담배도 끊은 지 12년이 됐지만, 당뇨 조절이 잘 안 되고 식습관이 불규칙하면서 지방간이 지방간염을 거쳐 간경변증으로 진행됐습니다. 혈당이 500을 넘어 쓰러진 적도 있었고, 황달 증상이 나타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술 없이도 간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제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 알코올성 지방간: 전체 지방간의 17%
- 비알코올성(대사 이상) 지방간: 전체 지방간의 83%
- 주요 위험 요인: 비만,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신체 활동 감소, 서구화된 식습관
- 지방간 → 지방간염 → 간 섬유화 → 간경변증 → 간암 순으로 단계적 진행
지방간염, 굳기 전에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
제가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가장 놀란 건, 20년 넘게 지방간을 달고 살면서도 아무 증상이 없었다는 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지방간이라는 진단을 받았어도 통증도 없고, 불편함도 없으니 그냥 방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상도 통증도 없던 두 사람이 조직 검사를 받았더니 둘 다 지방간염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중 한 명은 이미 간경변 문턱에 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지방간염(NASH, Non-Alcoholic SteatoHepatitis)이란 단순히 지방이 쌓인 지방간에서 한 단계 나아가 간세포에 염증이 생긴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간 섬유화(hepatic fibrosis), 즉 간 조직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지방간염을 막지 못하면 간경변증으로 이어질 확률이 약 20%에 달하고, 간경변증 이후에는 매년 2~4%씩 간암 발생 위험이 있습니다(출처: 한국간재단).
문제는 지방간염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아직 조직 검사 외에는 사실상 없다는 점입니다. 혈액 검사에서 AST, ALT 수치가 높게 나온다면 염증이 있다는 신호이고, 간 섬유화 스캔 검사로 지방량과 딱딱한 정도를 먼저 확인한 뒤, 섬유화가 2단계 이상으로 추정될 때 조직 검사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입니다. 간 섬유화 수치가 14 이상이면 간경변증으로 판단하는데, 이기우 씨의 수치는 16.2였습니다. 단순 지방간이라고 믿었던 분들이 실제로는 그 경계를 이미 넘어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지방간염 단계에서 검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미 굳은 간은 되돌릴 수 없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간경변증을 호전시키는 약제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한 번 굳어진 간은 돌이키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기우 씨의 담당 의사도 "현상 유지만 됐으면 좋겠다"는 환자의 말에, 신약으로 그 이상을 기대해볼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도 아직 지켜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든 생각은 결국 예방과 조기 관리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간경변증은 치료보다 진행을 막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알코올성이라면 금주가 첫 번째이고, 비알코올성이라면 체중 감량과 혈당·혈압·혈중 지질 관리가 핵심입니다. 단순히 약을 먹는 것만으로는 간의 염증이 줄어들지 않고, 대사 이상이 계속되는 한 간 섬유화는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식도 정맥류(esophageal varices)라는 합병증도 놓치면 안 됩니다. 위식도 정맥류란 간경변증으로 간으로 가는 혈관이 막히면서 식도와 위 주변으로 혈액이 우회해 혈관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혈관이 터지면 급격한 출혈로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어, 정기적인 내시경 검사로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제 지인도 복수가 찬 배를 보면서 의사를 찾아갔더라면, 이런 단계까지 가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B형 간염 예방접종, 정기 혈액 검사, 간 섬유화 스캔 검사, 그리고 필요하면 조직 검사까지. 간은 먼저 아프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확인하러 가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지방간이 있으면 무조건 간경변증이 되나요?
A. 단순 지방간은 생활습관 개선으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방간에서 지방간염으로 진행되는 경우인데, 지방간염 환자의 약 20%가 간경변증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방간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혈액 검사 수치와 간 섬유화 스캔 결과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술을 안 마셔도 간경변증이 올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전체 지방간 중 83%가 비알코올성, 즉 비만·당뇨·고지혈증 같은 대사 이상이 원인인 지방간입니다.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면 간에 지방이 쌓이고 염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 술을 전혀 못 마시는 분들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Q. 간 섬유화 검사는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A. 간 섬유화 스캔 검사(fibroscan)는 소화기내과나 간 클리닉에서 받을 수 있으며, 통증 없이 짧은 시간 안에 간의 지방량과 딱딱한 정도를 측정합니다. 섬유화 수치가 2단계 이상으로 나오거나 혈액 검사에서 AST·ALT 수치가 높다면 조직 검사까지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Q. 간경변증이 생기면 복수 말고 어떤 증상이 더 나타나나요?
A. 복수 외에도 황달(피부나 눈이 노랗게 변함), 다리 부종, 쉽게 멍이 드는 증상, 식욕 저하, 심한 피로감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위식도 정맥류가 터지면 대량 출혈로 생명이 위험할 수 있어 정기적인 내시경 검사가 필수입니다.
결론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왜 좀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였습니다. 간경변증은 한 번 굳어진 간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간염 단계에서 막는 것이 사실상 마지막 골든타임입니다. 증상이 없어도, 아프지 않아도, 간은 조용히 굳어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결국 정기검진 하나로 상당 부분 막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혈액 검사에서 AST·ALT 수치가 높거나, 건강검진에서 지방간 소견이 나왔다면 그냥 넘기지 말고 간 섬유화 스캔 검사까지 이어서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간은 말이 없는 장기이니,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